瑜(유) 字兪玉(유옥) 號虔谷(건곡) 충목왕(忠穆王) 丙戌(一三四六)生 진사(進士)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중현대부(中顯大夫) 전농시 부정(典農寺副正)에 이르셨다. 고려(高麗) 말기를 당하여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시고 더 이상 벼슬할 생각이 없으셨는데 조선(朝鮮)이 건국되자 고려왕조(高麗王朝)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해서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72현(賢) 중 한 분이 되셨다. 『부조현언지록(不朝峴言志錄)』에 「수양산의 달빛이 내 마음을 비추네[首陽山月 照我心肝]」이란 시구(詩句)가 전한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당시 고려의 풍속이 부모의 상(喪)을 당하면 모두 백일만에 탈상(脫喪)을 하였으나 공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만이 삼년상(三年喪)을 마치니 당시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아버지와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 몸소 흙을 져다가 봉분(封墳)을 짓고 삼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한 사실이 『삼강행실(三綱行實)』·『대동야승(大東野乘)』 등의 문헌에 전한다. 만년(晩年)에 순창(淳昌)에서 순천(順天) 부유현(富有縣) 겸천(謙川)으로 옮기셨다.선덕(宣德) 戊申(一四二八)卒 조정(朝廷)에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예관(禮官)을 보내 일품(一品)의 예(禮)로 장사지내게 하고 묘소를 지키는 집 삼호(三戶)를 내리셨다. 그리고「효자전부정 조유의 정려[孝子前副正趙瑜之閭]」란 정려(旌閭)를 하사하시고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내리셔 지금까지 집안에 전하여 오고 있다. 이밖에 사적은『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동국여지승람(東國輿誌勝覽)』·『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여러 문헌에 자세히 보인다. 정려(旌閭)는 본래 순창 건곡(虔谷)에 있었다.현종(顯宗) 辛丑(一六六一)에 부유현, 즉 지금의 순천시 주암면(住岩面) 죽림리 겸천 위로 옮겨 세웠는데 대제학(大提學) 남유용(南有容)이 기문(記文)과 비문을 짓고 승지(承旨) 이의철(李宜喆)이 글씨를 썼다.숙종(肅宗) 庚子(一七二0)에 고을의 선비들이 겸천사(謙川祠)를 지어 제사를 모셨는데 이때 액(額:懸板)은 판서(判書) 신흠(申欽)이 쓰고 영의정(領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상량문(上樑文)을 지었으며 자의(諮議) 박광일(朴光一)이 봉안문(奉安文)과 축문(祝文)을 지었다.고종(高宗) 戊辰(一八六八) 서원철폐(書院撤廢) 이후에는 단(壇)을 설치하여 제사를 모시다가 乙未(一八九五)에 중건하였다. 墓순천시 주암면 주암동(住巖洞) 을좌(乙坐) 진선(進善) 김원행(金元行)이 비문을 짓고, 교리(校理) 조영순(趙榮順)이 글씨를 썼다. 또 좨주(祭酒) 송병선(宋秉璿)이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사용하고 전자(篆字)는 응교(應敎) 정희(鄭憘)가 썼다.삼가 동사(東史)를 조사하여 보면 「전부정(前副正) 조유(趙瑜)는 절의를 지킬 뜻을 두어 덕망(德望)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하였고, 또 사암(思菴) 박순(朴淳)은 일찍이 말하기를 「남쪽 지방에서 절의를 지킨 사람은 오직 조부정(趙副正) 한 사람뿐이었다」라고 하였다.配중군부인(中郡夫人) 潭陽鞠氏(담양국씨)